Utrecht, Netherlands
8-13~8-16 2022
여기를 오는 길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기차에서 내리라하더니 왠 버스를 타고 다른 역에서 기차를 또 탔다. 이걸 혼자 겪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하는 S의 말이 내 마음과 똑같아서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만큼 돌고 돌아 도착한 이 작은 도시는 내 마음에 오래 남을것 같았다. 처음으로 한달이나 두달 살기를 해볼만 한 곳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걸어다니는 사람보다,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유럽 사람들이 자전거 도로에 개념없이 걸으며 길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장 화를 많이 낸다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됐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매우 자유로워 보였다. 차 라는 작은 공간에 갇혀 있지 않고, 단 두 바퀴에 의존해서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리고, 자전거 뒤에 다양한 생활제품같은것을 실고, 머리에 헤드폰을 쓰고 앞으로 슝슝 나아가는 사람들.
페인팅으로 전공을 바꾸도록 응원해준 Knowles교수님의 작품을 보기 위해 갤러리를 찾았다. 사실 Utrecht에 오게 된 단 한가지의 이유였다. 내가 직접 10주동안 동고동락하며 창작의 고통을 함께 나눈 누군가의 영혼의 한 조각이 여기까지 와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그린 소녀는 다리를 낮추고 앞으로 나아갈 듯 한 자세로 등에 짊어진 지게 같은것 위에 많은 물건들- 물고기, 구슬, 책,-을 실고 있었다. 뭔가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등에 진 것들이 많아 주춤, 하는 순간 같은 그 작품은 나를 반영하는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나아갈 마음은 한껏인데, 내가 갖고 나아가려고 하는것이 많아 발이 쉽게 나아가지 않는듯한, 그러나 그것 자체도 생동감이 있는 도전의 한 걸음인것같이 말이다. 다음학기부터 페인팅전공으로 학업을 다시 진행하는 내게 큰 용기가 되었다. 바다 넘어 산 넘어 다른 나라에 와서 나를 응원해준 누군가의 작품을 보니 나도 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보았다.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듯한 소녀는 해맑고 천진난만한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짐이 많으면 어떠리, 나아가다가 좀 흘리면 어떠리. 모두, 단 한걸음을 내딛는 일부이니.
한번 입은 원피스와 유럽에 오기 전에 막 산 초록색 스웨이드 셔츠를 라이프치히 숙소에 두고 온것 같았다. 상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끼는 옷을 잃어버린것도 속상한거보니, 나는 상실을 견디는 것을 참 못하는 사람이긴 한것 같다. 잃어버린 옷들, 잃어버린 사람들, 잃어버린 기억들. 그러나 이번에 유럽에서는 상실이 없었다면 나는 나를 돌아보지 못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내게 구멍을 만드는 존재들은 결국 나를 성장하게 한다. 그리고 알게 해준다. 나는 그 구멍이 있어도 살아갈 수 있는 생각보다 유연하고 강한 존재라는것을. 그리고 신비롭게도 상실은 새로운 기회를 가져온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옷, 새로운 기억들. 상실의 양면은 그렇게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그러나 상실 없이는 나는 결국 새로운 기회를 받지 못하고, 나는 한 곳에서 머무를수 밖에 없는 더 슬픈 존재가 될테니까. 그러기엔 상실이 주는 새로운 삶은 너무나 찬란하다.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고 온 Utrecht를 돌았다. 강을 따라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이 모여 화단에 밝은 꽃들을 비추었다. 빨갛고 핑크색인 꽃들이 어디서나 만발해 있었다. 열린 창문들 사이로 사람들의 삶이 엿보였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다육이 화분들, 맥북 데스크탑 뒤통수, 거울, 성모 마리아상 같은 작은 조각상... 순간 내가 여행하는 진짜 이유는 만남을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과의 만남, 그 여행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의 한 조각과의 만남, 현지에서 살았던 예술가와 그 예술과의 만남, 그리고 나 스스로와의 만남... 만남이 존재하지 않는 관광과 소비의 여행은 너무 질린 내게 새로운 여행의 노크가 들렸던것 같다.
내일부터 S는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 오롯이 혼자 다닐 몇일간의 여행이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한다. 나와의 깊은 만남이 시작되는것일지도 모른다. 아무 탈 없이, 그래도 풍성하고 다양하게, 소중한 나와의 추억을 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