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 들린 숙소중에 가장 아늑한 곳이었다. 막 누군가가 살다간 사람 인기척이 많이 남았지만 또 그만큼 깨끗하게 정돈되어 나를 위해 준비된 장소였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분명 온라인으로 숙소의 사진 속 다락방 창문 아래에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었는데, 실제로 그 곳에는 아기의 침대가 생겼었다. 그 침대 주위로 생긴 새 생명이 지내는 흔적들.. 아기의 옷들이 걸린 조그만 옷걸이, 분유를 먹일 때 쓰는 U자형 베개, 그곳 뿐만 아니라 냉장고에도 아기 음식, 아기 음식 만드는 책도 부엌에 꽂혀있었다. 분명 혼자, 혹은 둘이 살았던 작은 공간에 이렇게 큰 변화의 흔적이 이렇게 아름다울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흔적을 보기만 했는데도 이 아기는 참 행복한 엄마가 있구나, 라고 느껴졌다. 요람 곳곳에 아기가 떨어질까봐 있는 폭신한 인형들, 그 위의 다락방 창문이 내리쬐는 햇살, 이 분은 여자에서 아내로,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따스히 겪는중인 것일까 하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 흔적 속에서 몇일 지내서 그런가, 마음이 평안하고 또 따뜻했던 장소였다.
도착한 다음날 한국에서 좋은 소식을 카톡으로 받았다. 고등학교때 짝꿍이었던 눈이 크고 맑았던 친구가 다음달에 결혼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대략 7년전 오랜만에 대구를 방문했을때 그 친구과 그 친구의 남자친구를 빛이 많이 들어오던 카페에서 만났었는데 그 분과 결혼을 하게 됐다며 미국에서 한국에 와서 자기를 직접 만나준 내게 고마웠다며, 고등학생 시절속 나와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작은 문자를 남겨주었다. 새삼 그녀 자체가 좋은 소식이 되어 유럽에 있는 내게 날라와준 그녀에게 감동했다. 나는 늘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주기를, 문 두드려주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좋은 소식이 되자고 다짐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직접 좋은 소식이 되어 내게 용기내어 연락해준 그녀에게 정말 고마웠다. 결혼식에 갈 수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었다. 누군가의 소식에 기뻐해주는건 이런것일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점심, 저녁 식사 뒤 양치를 했다. 수업시간에 단 한번도 졸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필기를 하던 단정하고 바른 친구였다. 그녀 덕에 나는 늘 양치도 깨끗히, 필기도 단정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녀가 창가쪽에 앉았던적이 있었는데 오후에 교실로 들어오는 햇빛을 듬뿍 받은 그녀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웃던 모습들이 아직 선명히 기억난다. 공부를 잘하는 만큼 재치도 있고 성격도 밝아서, 그렇게 미국에 가서도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는지도 모른다. 오랜 인연 끝 새로운 시작을 하는 그녀에게 큰 사랑과 축복을 파리에서 보낸다.
런던을 떠난 이후로 아들린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녀가 풍기는 오묘하지만 예쁜 미소는 여전했다. 늘 쇄골쪽에 찰랑거리던 머리는 턱 길이로 단정하게 잘라져있었다. 파리 정중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지나다니는곳의 야외 테이블에서 함께 티와 자몽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그때는 아이 돌보미로 런던에 있었지만 지금은 파리에서 일하는 독립적인 여성이라 그런지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파리에 있는 동안 만난 프랑스 사람들과는 훨씬 부드러웠다. 영어로 또박또박 하는 말을 하는 내게 본인에게 대체 왜 말을 거는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딱딱하게 대꾸하는 낯선 프랑스 사람들의 얼굴과는 달랐다. 내 말에 조용히 웃음지으며 작은 담배를 머금고는 살포시 고개를 끄덕여주는 누군가. 사실 파리는 내게 딱히 좋은 기억이 없는 아직도 낯선 장소인데, 그녀와 함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테라스 테이블에 앉고 나서는 그렇게 시끄럽고 더럽고 낯선 풍경도 조금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내가 변했다고 한들 나를 똑같이 대해주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주는 사람이 바다 건너 산 넘어 먼 땅에 존재함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아들린은 만난지 1년된 남자친구를 true love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결혼은 할수도 있는거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도 했다. 놀라웠다. 그렇게 잔잔하고 잠잠했던 그녀가 말하는 true love라면, 진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파리 중심에서 엄청난 인파속에서 엄청난 담배연기를 먹기 시작하고 나서여서 일까, 나는 하루 종일 뒷머리 통증과 편두통에 시달리다 겨우 침대에 몸을 뉘였다. 지베르니 이후로 또 다시 한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양치도 못하고 세수도 못하고 잠들어야 할 만큼 괴로운 밤을 보냈다. 점점 극내향인이 되어가는 내가 느껴졌다. 사람이 많으면 숨을 잘 쉬지 않고 있거나 긴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나마 이어폰으로 소음을 차단했지만 나의 버블안에 무수히 침범하는 사람들의 형체와 냄새, 빛깔에 그 어느때보다 초예민하게 반응했다. 도시가 나에게 주는 속도와 공격은 내가 생각하는것보다 몇배로 더 강하게 나 스스로가 받아들이는듯 했다. 현수와 함께 동행할때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는데, 첫 혼자 유럽 여행에 몸이 제대로 배우고 느끼는듯 했다. 여행은 체력싸움이라더니, 말이 제대로 실감이 나는 파리의 날들이었다. 나이가 조금씩 더 들면서 내가 훨씬 내향적이게 변하고 있음을 절감하며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앞서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마음도 들었다. 내가 사실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나의 모습으로 되어가는것 같아서 말이다. 그에 맞게 내게 더 귀 기울여주고 아침밥도 잘 챙겨먹어야하고 낮잠도 자야하고... 손이 더 많이 가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마음이 편했으면 한다.
Musée de l'Orangerie
오후 내내 미술속을 거닐었다. 너무 보고싶었던 모네의 수련 대작을 보러 오랑주리에 먼저 갔다. 원래 미술관이 아니라 실내정원이어서 그런지 흰 벽에 비추는 파리의 구름낀 햇살이 너무 찬란했다. 그 빛의 색감에 따라 모네가 그린 수련들은 둥그런 벽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듯 넘실거렸다. 오디오 정보를 듣다가 기계를 내려놓고 요요마의 바흐 골든베르크 협주곡을 들었다. 연보라와 마브 분홍색이 넘쳐나던 판넬이 있었는데, 그 판넬 앞에서 가장 오래 서 있었다. 연분홍 수련은 다른 캔버스와는 비교적 작은 크기로 듬성듬성 떠있었고, 양쪽 구석에는 모네의 정원의 버드나무들이 기다랗게 잎들을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고 나니 내 옆, 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와 그 작품만 이 세상에 서있는것 같았다. 짙은 남색은 연보라색을 부드럽게 이어주고, 어두운 회색끼가 도는 분홍색은 희끄므레 한 빛 줄기들을 보여주는듯 했다. 뭔지 모르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때문에 그 판넬은 내 마음에 평안함을 주었다. 실제의 작품 앞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이고, 또 위로였다. 둥근 벽에 고의적으로 둥근 캔버스 위에 그린 모네는 영원함과 reconciliation, 만물과 자연 사이의 화해이자, 다리가 되어주고 싶었다고 한다. 우린 그렇게 만물, 그 자연과 멀어지고 자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함, 즉 나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때 우리는 평안을 잃는다. 모네는 그의 정원 안에 있는 호수에 비친 수련들을 보며 다시 원래 만물에 소속되는 평안을 찾은건지도 모른다. 내게 그 평안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누구냐이고, 그 사실을 다시 내 영혼이 보고 찾고 받아들일 때, 그 평안은 내게 힘을 준다. 그 단 하나의 영원할듯한 평안을 느꼈기에, 모네의 작품을 직접 낯선 파리까지 가서 본것이 내게는 절대 아깝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To be really honest, what Monet painted on the canvases of Orangerie did not look like the actual garden at Giverny. It was evident that Monet was able to see what noone did. The paintings were on the other side of reality. It almost did not look like a garden or a pond. It was basically an eternal celebration of water and botanicals. Then I realized that he, as an artist, did his job in his life. He nailed it. It was to show the world what only he sees, and it was beautifully painted in these large wall canvases. I have been told numerously during the Herrnhut retreat that I see the 'beauty of God.' Never thought to myself, but people seemed to see it in my works. And that may be the only job of mine in my life time. And if that is so, I am content. I still strive, but just the fact that I am on that path as a chosen? Can't hope for anything else. I'll be happier than Monet. To capture His beauty.
Musée d'Orsay
오르세이 미술관은 거대했다. 6층을 모두 볼 수 없겠다는 결정을 아주 빨리 한 뒤 인상주의가 시작할 시기인 5층으로 바로 갔다. 거대한 만큼 사람 10명보다도 키가 높은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쿠르베의 A burial at Ornans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큰 작품을 본 것이 대체 마지막으로 언제였을까?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려진 사람들은 나보다도 커다랬다. 그 이야기의 메시지의 반은 그 이야기가 입고 있는 크기가 모든것을 이미 말해주는듯 했다. 쿠르베가 담은 이야기는 마을의 가장 일상적인, 장례식의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이 내 눈 앞에 풍경처럼 크게 펼쳐지자 그 일상은 더이상 일상이 아닌 신비롭고 밀착된 그 느낌을 진하게 전달했다. 실제로 그 순간이, 그 사람들이 어슬렁 어슬렁 관을 끼고 내 앞을 지나가는 듯 했다. 그렇게 그림이 주는 어마한 힘을 절감했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지나치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가장 확대하여 다시 소개시켜주며, 우리에게 또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것.
I got to see not only Monet's work in person but Vincent's, Renoir's, and also Whistler's. They were all on the top two floors, and the building had glass in the ceilings as the sunlight poured down to the canvases. Such pure, neutral warm sunlight embraced the paintings and it was powerful enough that the countless group of visitors remained silenced. The room had dark brown mahogany walls and had wooden floors. Monet's works were bigger than I expected, and they had such interesting sizes and forms. The Luncheon at the Garden was fascinating to see two separate canvases in different sizes becoming one. Monet's brush strokes of the dresses of females and the flowers were most distinguishing from other impressionism painters. He had a certain roughness of his brush strokes that was almost, mad, energetic, that seemed as if his brush end was really bad. I believe that was all about the start of impressionism; the impression, the energy, the emotion that was right there at the moment he was facing the scene, and the nature... I very often try to restrict and resist such energy and emotion I feel in front of a photograph, or a canvas. I don't know why but putting my 100% upon my photographs and canvas seem like a secret chamber. Nonetheless, I still do, fall all over my works, with no control. But creation becomes harder because those thoughts are pulling me back so tightly when I fall forward to the blank canvas. When it will be, as I will be able to just roughly strike my brush on the canvas with such energy, raw emotions, even if that may be anger? Seeing Monet's real brush strokes definitely gradually have started to melt away those lies, false rules, and self doubt.
오랑주리 미술관에 나오면서 잠시 출구로 나가기 전 대리석 의자들에 앉아 곰곰히 생각했다. 하루 종일 나는 미술을 본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직접 만난 느낌이 들었다. 미술이 주는 육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생명을 내 몸이, 내 마음이 받아들이고 있는것이 느껴졌다. 그 작품은 그 사람 자체, 그 영혼 자체임을 새삼 실감했다. 그만큼 강렬하고 또 새로웠다. 그리고 아티스트로서 외면하고 있던 예술 그 자체의 힘을 절감하며 온 몸에 전율이 돋았다. 하루종일 서있고, 걷고, 집중한다고 눈은 피곤하고 구두를 신은 발은 아팠지만 마음은 뜨거워졌다고 해야할까. 아티스트로서 살겠다고 다짐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런 예술을 만들고 싶다는 첫사랑을 기억했다. 예술이 내게 주었던 것은 위로이고 힘이었기에. 그런 작품을 만들어 이 세상 사람들이 똑같이, 느낄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 나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내 작품을 통해 나를 만나, 내 안에 있는 아름다움, 생명, 소망, 위로, 를 받아갈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