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찍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이다. 나는 그와 특별히 친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았지만- 내 삶의 짧지않은 시간을 한 공간에서 살았고, 내 기억속에 그리고 내 핏속에 생각보다 선명하고 뚜렷하게 새겨진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죽음은 나에게 큰 영감이자 폭풍을 남겼다. 그가 아파하고, 병실에 힘없이 누워있으며, 소리를 지르고 죽을 힘을 다해 죽음에 맞서 싸우는 모습들을 내가 직접 볼 수 있었음에 나는 감사하다. 내 삶과 생명을 돌아보게 하는 죽음. 그 크나큰 아이러니함을 나는 몇개월 내내 꼼짝 않고 느끼고 경험하고 돌아왔다. 비자가 아니라 그 죽음을 가까이에서 맛보려고 한국에 간건지도 모른다.
그 죽음은 나의 엄마를, 내 과거를, 내 아픔들을, 모두 회상케 했다. 내가 더 부단히, 아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상처와 눈물, 호소, 괴로움, 많은 것을 드러나게 했다. 내 안에 가장 큰 뿌리는 슬픔이었고, 그 슬픔이라는 이름에 붙어있는 많은 잔가지들은 생각보다 내 삶을 징그럽게 지배하고 있었다. 있는듯 없는듯 하며, 내 감정, 생각, 행동에 모든것을 손아귀로 꽉 누르고 있는것 그 슬픔. 나는 그 슬픔을 나 스스로라는 통로를 통해 정화시키고 싶었다. 늘 있었기에, 밉지도 또 반기지도 않는 그 존재를, 처음으로 환영하고 싶었다. 나 자신이기에. 슬픔도 나 자신이기에.
슬프다고 더이상 곡하고 울지 않기로 생각하며, 그저 아름답게 슬퍼할수 있고, 슬퍼할 일이 있고, 그 슬픔으로 하여금 더 여려지며 아리따워지는 나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정말 귀하고 찬란한 시간들을 이렇게 남긴다.
She squeezes that love for me every morning; it’s almost like her: sour, sweet, and full of nutrition. She always makes that face everytime she drinks her self-made healthy juice. I always deny it, the love, her love, that is always present. I don’t want to look, because I know I can’t avoid it. Love carries hurt together no matter what because the love is portrayed through a weak, fragile existence called human. And those humans have name tags called mother and a father. Ironically, those name tags give us such attachments that are so, so close that gives us deficiency. Almost sadness. And we grow crying. Sad.
The last memories of sadness: she lays in the bathtub, end of her day. She needs a bit of a help- she turns around with her back and crouches. And she is, so, small, she might drown down to her warm water. The one moment when all the time, the years that is a bit longer than ten years, that have weighed her shoulders so heavy for too long; that now it is so enormously dark that makes me see her so tiny, almost, sad.
And I lament.
The first memories of sadness comes from a clothing of her. Her blood was on her collar of her shirt, until now I do not know why. I was in middle school, about the time I started my period. The moment when I saw the shirt hung on the wooden hanger in her dark room was never erased from my memories. The fact that she was possibly hurt, needed of help, angry, desperate- but no one was there for her- traumatized my emotions where I could not and I cannot do anything for her. It was a moment of realization of weakness; that even her- she is a human who suffers from fragility, pain, and desperation.
And I lamented, since then.
Her shoulders were small enough to visualize the absence; absence of him, where it has now been too long to wonder if it could be filled. The reason why we cry, we get angry, and we get so sad, is because of absence. Where it needs to be filled. It’s the absence.
참 오랫동안 앓고 있었던 질병처럼, 오랫동안 내 안에 두었던 친구처럼- 내 안에 늘 내재되어 왔던 애증의 친구라고 해야하나, 너무 가깝지만, 그래서 더 알아봐주기 싫었던, 알고싶지 않았던, 내보이고 싶지 않은- 그러한 알수 없는 대상. 감정이고 행동이고 내 표정이며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이기도 한, 지금 부터도 내 안에서 없어지지 않을, 힘이며 동시에 나약함인- 슬픔. 나의 슬픔은 여태 분노와 아픔, 상처로 많이 변질되어 표현되고는 했는데, 그 모든 뿌리는 슬픔인것임을, 결핍을 통해 느껴지는 슬픔은 신기하게도, 결핍이 만든 약함이라는 자리에 사랑을 찾게 된다. 세상과 인간 속에 나타나는 진짜와 같은 가짜 사랑에 잠시 숨돌리다가, 다시 아프고 또 상처받지만 다시 진짜를 찾을 수 있는 용기를 만든다. 슬픔은 그렇다. 그래서 어쩌면 슬픔을 끊임없이 맞대고 대면하려고 나는, 사실은 정말 기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진짜배기 사랑을 찾았고 또 찾으려고 하며 그런 하루가 쌓이다보면 행복은, 자연스러운것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슬픔은 사실 내게 그렇게 어둡지 않다. 가끔 몰려와 잠시 낮아지게 할 뿐, 나를 잠시 멈추게 하며, 고요하게 한다. 그렇게 차갑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다. 아픔은 슬픔의 깊이 언저리에 있는 뚜껑일 뿐이다. 그것을 모르고 나는 평생을 회피해 왔다. 슬픔이 만들어내는 고독과 인내를 열심히 도망쳐왔다. 그것은 관계속에서도 나를 이상하리만치 밝게 만들었고, 나를 바라볼때 조차도 울면 안되는, 조금은 다크한 생각의 고리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강박관념속에서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러한 내 모습은 나의 엄마에게서 가장 많이 비춰진다. 그녀는 타지에서 오랜 시간을 가족을 위해 버텨왔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십년째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며, 이곳에서 사업과 교회일을 도맡아 하고 계신 엄마. 짜증과 화, 조급함, 미움- 뜨겁다고 온도를 말할수 있는 그 모든것을 내재하고 있는 그녀를 참 오랫동안 회피하고 싶었던 나는 집이 괴로왔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조금은 알것같은 그 뜨거움은, 사실은 어마어마한 슬픔을 내포하고 있다는것을 안다. 그 슬픔은 그녀의 결핍을 말하며, 영혼속에 마음속에 생겨버린 구멍이 얼마나 큰지 말하고 있다. 더 슬프게도, 시간은 야속하게도 그 구멍을 채워주지 못할 망정 더 무디게 만든것 같다.
본인의 아버지와 친오빠의 죽음을 타지에서, 먼 곳에서 경험하며 아무말 없이 견디는 그녀에게는 어떠한 아이가 아직도 울고 있을까. 그 구명에, 그 결핍에, 어떠한 슬픔이 흘러내리고 있는걸까. 피붙이로서 솔직히 나는 아직도 피부로 느껴지지 않지만, 거부할수 없을만큼의 연결성이 느껴지는것은 사실이다. 사진을 십년째 하지만 드디어 내 가장 가까이 있는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사진기를 드는것은 처음이다. 슬픔은, 그렇게 가까이 있는것이다. 매일 집에 오면 그녀가 있듯, 눈을 뜨면 옆 방에서 자고 있듯이, 내게는 그토록 가까운 슬픔을 나는 옷깃을 여미듯 조심스럽게, 담는다.
또 다른 상실은 과거의 ‘당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즉, 상실이 일어나기 전의 당신 모습, 결코 다시 존재하지 않을 당신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슬픔에 대해 전혀 몰랐다.
이토록 나쁘게 느낄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슬픔에 잠긴 지금, 새로운 ‘당신’은 영원히 변화된 채로 부서지고, 깨지고, 회복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일시적인 감정은 사라질지라도 결코 예전의 당신으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워진 당신, 달라진 당신, 결코 다시 예전과 같아질 수 없는 당신,
과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당신만이 남는다.
엄청난 상실에 순수함을 잃고, 다만 상처받기 쉬운 마음과 슬픔 그리고 이런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과
일어난 새로운 현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엘리자베스 로스, 상실 수업
고통을 겪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때가 되면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치유될 것이며, 온전한 자신을 되찾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그리고 여행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슬퍼한 사람이
결코 우리에게 소유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며
상실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부분, 사랑하는 이들의 진정한 부분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다.
나아가 정말로 소중한 것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느낀 사랑과 우리가 준 사랑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김소향